경상북도 칠곡 출신. 1919년 3·1만세시위 때 향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200여 명을 규합,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일본경찰에 잡혀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같은 해 10월 9개월로 감형되었다.
그 뒤 1927년 5월 동향인 장진홍(張鎭弘) 등과 함께 대구지점 조선은행을 폭파시킬 때 총참모로 활약하였다. 일본경찰의 추격을 피하여 은신하던 중, 같은 해 8월 구미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1982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