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초명은 이석로(李奭老). 자는 공우(公右). 호는 도헌(道軒)·만회당(萬悔堂). 진사 이형부(李馨溥)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나 문명을 얻었으나 과거에는 계속 낙제하였다. 1881년(고종 18)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다가 1883년 품계가 6품이 되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 해 수찬이 되어 대원군을 탄핵한 유생 최익현(崔益鉉)의 처벌을 상소한 봉조하(奉朝賀) 강로(姜㳣)를 파직하고 유배시킬 것을 주장하는 옥당(玉堂)의 연차(聯箚)에 참여하였다.
그 뒤 교수·헌납·동부승지·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885년 분병조참지(分兵曹參知)를 거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어 공조참의·호조참의를 지냈으며, 1890년에는 부호군으로 문무제관과 함께 종척집사(宗戚執事)를 맡았다.
그 뒤 정국이 혼란하여지자 낙향하여 시문을 즐겼다. 1902년 기로사(耆老社)에 들어 가자(加資)되었으며,1904년에는 장례원소경(掌禮院少卿)에 임명되었으나 노령으로 사퇴하였다. 이대직은 1905년 11월 6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