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전(子典), 호는 일죽(一竹).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이언침(李彦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소격서참봉 이지남(李至男)이다. 아버지는 부호군 이기설(李基卨)이며, 어머니는 참봉 허진(許禛)의 딸이다.
이돈오의 문명이 높아지자 1608년(선조 41)에 선공감역(繕工監役)으로 천거, 등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다시 제릉참봉(齊陵參奉)으로 임용되고, 1614년(광해군 6)에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으로 전임되고, 곧 사섬시봉사(司贍寺奉事)를 거쳐 1616년에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이 되었다. 이듬해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여, 1625년(인조 3)에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으로 등용되었고, 1628년에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 1632년에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정선군수로 전보되었으나 사임하였다. 1634년에 광흥고수(廣興庫守)로 복직, 국고출납의 질서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외직인 가평군수로 나가 여러 가지 숙폐(宿弊)를 고쳤으며, 1636년에 사직하였다.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건너가서 훈련도감낭청으로 군기(軍器)를 관리하다가, 적이 침입하자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현(忠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