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형천(亨天), 법호는 도산(道山). 전라남도 영광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7년 박중빈(朴重彬)의 제자가 된 뒤, 당시 원불교에서 추진하던 농촌운동을 신흥마을에서 야학을 실시하여 문맹퇴치에 힘써고 교향 신천리에 묘량 수신조합(守信組合)을 설립하여 신흥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1923년에 출가하여 원불교 전무출신이 되면서 중앙총부 서무부장, 농업·상조부장, 공익부장, 육영부장, 보화당전무이사, 산업부장 등으로 봉직하면서 초기의 교단창립과정에서 산업분야를 맡아 큰 업적과 공을 세웠다.
1934년에 창설된 원불교의 대표적인 산업기관인 보화당(普化堂) 한약방은 그의 노력이 뒷받침된 것이며, 산업부장 재임시 삼례과원(현 수계농원)을 만들었다.
한편, 수행에도 크게 힘써 이사병행(理事並行)의 표준을 보였다. 1926년에 수위단원(首位團員)에 피선되었고, 1941년 총부 산업부장으로 재직중 죽었다. 대봉도(大奉道)의 법훈(法勳)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