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상 ()

정치·법제
인물
일제강점기 때, 신민요와 대중가요를 작곡하였고, 해방 이후에 북한에서, 북조선음악동맹 위원장, 평양음악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음악인 · 관료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이운정(李雲亭), 이춘상, 이훈상街村冕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8년 4월 8일
사망 연도
1989년 6월 25일
출생지
함경남도 함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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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때, 신민요와 대중가요를 작곡하였고, 해방 이후에 북한에서, 북조선음악동맹 위원장, 평양음악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음악인 · 관료 ·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08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1916년 4월 사립 덕흥학교에 입학, 1919년 졸업한 후 1922년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중퇴하고, 같은해 함흥사범학교 특설과에 입학, 1925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 원산제이보통학교의 훈도를 지내면서 음악에 관심을 가져 동요와 민요를 연구했다. 1929년 11월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동조, 참여했다가 퇴직 처분을 받은 후,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음악학교에 입학, 1933년 4월 졸업했다. 졸업 후 귀국, 포리돌(Polydor)레코드사 전속 작곡가로 취직해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 민요풍의 가요와 신민요, 대중가요를 작곡, 발표했다. 1937년 일본 빅타(Victor)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 활동했다.

1937년 5월 조선의 가요를 정화해 일본의 국체(國體)와 전시체제의 선전물로 전환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외곽단체로 조직한 단체인 조선문예회가 년 6월 이왕직 아악부에서 개최한 조선문예회 제1부 작품 시연회에서 최남선 작사의 「동산」에 곡을 붙여 발표했다. 같은해 7월에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문예회 주최 제1회 신작가요발표회에 출연, 「복사 」, 「붉은 송이」를 발표했다. 이 때 발표된 가요들은 『가곡집』 제1집으로 조선문예회가 편집, 발행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가 주최한 애국가요대회에 「전장의 가을」, 「종군간호부」, 「정의의 師여」, 「총후의 남」 등을 발표했다. 1940년에는 경성방송국에서 기원2600년기념 가요 현상공모에 「흥아의 봄」과 「물레감는 처자」가 당선되었다. 이와 함께 19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반에도 신민요와 대중가요를 계속 발표했다. 1939년부터는 빅타레코드사의 전속 작곡가로 활동했고, 1942년 7월 창립된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는 문화통신사기자로 활동하다가, 10월쯤 고향으로 돌아가 함경남도음악건설동맹위원장이 되었고, 함양악단을 조직, 활동했다. 1946년 조직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산하의 북조선음악동맹의 위원장으로, 1947년부터 1989년까지 활동했다. 1953년 9월 조선작곡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 5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겸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2월 평양음악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1958년 1월 북한·소련친선협회 중앙위원에 임명되었고, 6월 북한·프랑스친선협회 부위원장, 7월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59년 8월 김일성의 만주 항일 무장투쟁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곡 작품 「밀림아 말하라」로 인민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11월 북한·네팔친선협회 위원장이 되었다. 1961년 1월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3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북한 최고의 예술가에게 부여되는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고, 9월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 11월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1년 4월 예술가 대표단장으로 쿠바를 방문했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이 되었다. 1973년 5월 문화대표 단장으로 루마니아를 방문했다.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1년 7월 피바다가극단 창립 10주년 기념 보고회에, 북·중우호조약 체결 20주년 기념 집회에 참석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6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에도 선출되었다. 1989년 6월 25일 사망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1966년판 한국북한인명사전』
『조광』5-3(1939.3)
『동아일보』(1933.8.6, 1937.9.26, 1940.6.9, 8.3)
『삼천리』5-3(1933.3)
『조선일보』(1933.2.14, 1940.6.9, 8.3)
집필자
조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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