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州)·관해(觀海). 신당부수(神堂副守) 이정(李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희검(李希儉)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수광(李晬光)이며, 어머니는 김대섭(金大涉)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고, 1612년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해 수찬으로 등용되었다. 이어서 예조·병조좌랑을 거쳐 1622년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 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을 접대하였다.
교리·응교 등을 거쳐 1623년(인조 1)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했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26년 대사간이 되고, 이듬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의가 되어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그 해 승지가 되었다가 외직인 임천군수로 나갔다.
1636년 이조참판·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역임하였다.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기 위해 배편을 준비했으나, 적군의 진격이 빨라 왕이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소임을 완수할 수 없었다. 난이 끝난 뒤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로 영변에 유배되었다가 아산으로 옮겨졌다. 유배지에서 책임을 통감하면서 날마다 눈물로 자책을 하다가 1649년에 풀려났다. 그 뒤 부제학·대사성·도승지·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했을 뿐 아니라, 저술을 좋아해서 평생 쓴 책이 4,000권이 되었으나 병화에 거의 타버렸다 한다. 저서로는 『동주집(東州集)』·『독사수필(讀史隨筆)』·『간언귀감(諫言龜鑑)』·『당률광선(唐律廣選)』 등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