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렬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내장원경, 의정부 참찬,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한 관료.
이칭
퇴암(退菴)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5년(고종 2)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예안(禮安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출생지
경기도 안성
관련 사건
갑오개혁|을미사변|을사조약
정의
대한제국기 내장원경, 의정부 참찬,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본관은 예안(禮安). 호는 퇴암(退菴). 경기도 안성 출신. 이상훈(李相勳)의 아들이며, 이상유(李相逌)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판관으로 1888년(고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관원으로 활약하였다.

이듬해 응교의 직위에 있으면서 홍문관의 연명 차자(箚子)를 주도하였고, 1890년 규장각직각·시강원겸문학 등을 지냈다. 1891년 시강원문학을 거쳐 이해 증광문과의 초시시관을 맡은 뒤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어 진하시급좌당수하시(陳賀時及坐堂受賀時)에 상례(相禮)로 참가하여 가자되었고,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나 그 뒤 직무상의 문제로 유배당하였다가 곧 방면되었다.

1894년 호남전운사(湖南轉運使)로 나가 세곡(稅穀) 운송의 업무를 맡아보다가 갑오개혁으로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지자 면직되었다. 1895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전국이 23부(府)로 편성되면서 진주부 관찰사에 임명되고 주임관2등이 주어졌으며, 곧 이어 왕후궁대부로 칙임관4등에 서임되었고 내각총서도 지냈다.

이 해 을미사변이 발생하여 인산(因山) 때 종척집사(宗戚執事)를 맡았다. 1896년 민비의 혼전향관(魂殿享官)에 임명되어 가자되었고 경상북도 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 1898년 중추원일등의관으로 칙임관3등이 주어졌으며, 왕아법오각국편의주찰겸리사사(往俄法墺各國便宜駐紮兼理使事)를 맡은 뒤 탁지부협판(度支部協辦)에 임명되었다.

1899년 평리원 재판장에 기용되어 칙임관 2등이 주어지고, 1900년에는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를 역임하고 경상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지만, 거듭 사퇴 의사를 밝혀 면직되었다.

1903년 다시 경상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전라북도 관찰사로 보직이 바뀌었다. 그런데 탁지부의 계속된 업무 보고 독촉에도 실행하지 않아 탁지부대신 이용익(李容翊)의 상주로 면관되었다.

1904년 내장원경·전라남도 관찰사·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하였고 이어 궁내부 특진관을 지낸 뒤 경상남도 순찰사로 외직에 나갔으나 신병으로 김연식(金璉植)과 교체되었다.

1905년 궁내부 특진관에 재임용되었으며, 왕명으로 복제(服制)를 개정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여 최익현(崔益鉉)의 주장과 같이 전통적인 복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최익현으로부터 창의구국(倡義救國)을 역설하고 거사의 협력을 종용하는 서간을 받았다. 그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여주로 낙향하여 민종식(閔宗植)·이시영(李始榮)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규합하기로 하고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의병 명부를 압수당하여 많은 의병이 붙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자신의 불찰을 깊이 후회하고 단식으로 자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면암문집(勉菴文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하원호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