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군미(君美). 이우생(李遇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평안도절도사 이수철(李守哲)이다. 아버지는 찬성 이손(李蓀)이며, 어머니는 용양위호군 이계반(李繼潘)의 딸이다.
중종반정 후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봉되었고, 1509년(중종 4)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510년에는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511년에 장령을 지낸 뒤 1512년에는 무재(武才)가 있다고 해서 김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노부모 봉양을 이유로 부임을 회피하였으므로 수원부사와 서로 바꾸었다.
1517년에는 수원부사로 있으면서 이행(李荇)을 변론한 상서가 광패(狂悖)한 표현이 많다고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19년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에 의하여 이루어진 대규모의 정국공신 삭훈시에 이성언도 삭훈되었다가 기묘사화 후 복적되었다.
1522년에는 당시에 통훈대부 검상이었으나, 무재를 지닌 문신으로 여겨져 당상관으로 가자된 뒤 만포첨사에 임명되었다. 1525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528년에는 다시 무재가 있다는 이유로 가자되면서 함경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 황주목사를 지내고 1531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1532년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533년에는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 1534년에 진위진향사(陳慰進香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