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의종 24) 대장군으로 왕의 보현원(普賢院) 행차를 호종하였다가 문신 한뢰(韓賴)에게 뺨을 맞고 모욕을 당하였는데, 이것이 정중부(鄭仲夫)·이고(李高) 등 같이 호종하던 무신들의 감정을 폭발시켜 무신란의 발단이 되었다.
무신란 직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올랐으며, 1171년 좌간의(左諫議) 김신윤(金莘尹), 우간의(右諫議) 김보당(金甫當) 등과 함께 의종 때 환관(宦官) 정함(鄭諴)의 고신(告身)에 서명한 재상 최윤의(崔允儀),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고 망령되게 아뢴 서해안찰사(西海按察使) 박순하(朴純嘏), 금거북이를 바친 지수주사(知水州事) 오록지(吳錄之) 등을 탄핵하며 그 자손들을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禁錮] 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뒤 1180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죽었다. 그러나 봉록(俸祿)과 지위에 미련을 가져 나이가 70이 넘었는데도 치사(致仕)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