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중가(仲嘉). 이추(李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의영(李宜榮)이다. 아버지는 이난(李蘭)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1525년(중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4년 동지사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정랑을 거쳐, 1538년 예조정랑으로 별시문과의 시관(試官)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성균관직강을 거쳐 김해부사가 되었는데 이 때 사간원에서 방수(防戍: 국경의 방어)에 경험이 없는 문신을 변방인 김해부사로 임명함을 부당하다고 지적하자, 중종은 김해의 현재 사정은 방어 문제보다 치민(治民)이 더욱 긴요하므로 문사(文士)인 이순형이 적합하다고 하였다.
괴산군수를 거쳐 1542년(중종 37) 청주목사가 되어 식년문과 향시(鄕試)의 상시관(上試官)을 역임하였다. 1548년(명종 3) 효열황후(孝列皇后) 상에 진위사로 명나라에 갔는데, 삼우하(三又河)에서 수레가 전복되어 표문(表文: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 물에 빠져 본국에서 다시 보내 위급을 모면하였다.
1550년 형조참의에 이어 병조참지를 역임하고 1552년 경주부윤이 되었는데 이듬해 혹심한 기근으로 도적이 성행하고 게다가 동헌(東軒)에 화재가 발생, 이에 대한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다시 원주목사를 거쳐 1563년(명종 18) 장례원판결사, 이듬해 충청도관찰사, 1565년 안동부사, 이듬해 한성부우윤을 거쳐 1567년 한성부좌윤에 올랐다. 70세가 넘어 1573년(선조 6)에는 정시문과의 시관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