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익흥(益興). 원주(原州) 출신. 자는 위중(衛仲). 이문보(李文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명상(李鳴商)이다. 아버지는 이약(李約)이며, 어머니는 이희방(李希芳)의 딸이다.
1600년(선조 33)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03년 예조좌랑이 되고, 1606년 문관 겸 선전관(文官兼宣傳館)으로 재직 중 문묘(文廟)의 익명서(匿名書) 사건에 연루되어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평해군수를 역임하고 오랜 기간 창덕궁의 수리에 종사한 공로로 1612년(광해군 4) 5품에서 전례가 없는 당상(堂上)에 올라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1617년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논의에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 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듬해 봉상시정이 되고 1622년(광해군 14)에 필선(弼善), 이듬해 장령이 되었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멀리 도망가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