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화(仲和). 목사 이기(李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이정수(李廷秀)이다. 아버지는 형조정랑 이빈(李贇)이며, 어머니는 증찬성 이언우(李彦佑)의 딸이다.
일찍이 과업에 뜻을 두어 진사에 오른 뒤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학생 때인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 논의가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향리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성균관에 추천되어 재임(齋任)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해군 때 폐모론에 동조한 유생들의 유적삭제문제(儒籍削除問題)가 일어나자, 위력에 못 이겨 추종한 자는 제거시킬 것을 주장, 이를 당시 성균관대사성 정엽(鄭曄)에게 건의하여 뜻을 이루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경상도로 피란하여 그곳에 가까이 있는 정경세(鄭經世)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며, 이듬해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제수받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뒤에 남별궁감조관(南別宮監造官)이 되었을 때 제조(提調)였던 김자점(金自點)에게 수모를 당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방으로 피란갔으며, 만년 18년간을 은거하다가 용인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