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우계(羽溪). 영천(榮川) 출신. 자는 여첨(汝瞻). 아버지는 이효린(李孝麟)이며, 어머니는 이여량(李汝樑)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4년(광해군 6) 홍문록(弘文錄: 홍문과 교리·제학 등을 선발하기 위한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오르고 이듬해 정언이 되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幽閉) 논의에 이원익(李元翼)의 언사가 왕에 대해 무례함을 비판하였다.
1616년 부수찬을 거쳐, 부교리로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교리가 되어 인목대비의 유폐 논의에 “쟁리(爭利)와 예의를 절충하면 은(恩)과 의(義)의 경중을 따라 스스로 대처할 바가 있다.”고 하여 빨리 결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1618년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파병할 때 강홍립(姜弘立)을 수행하였으며, 돌아와 예조정랑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풍기군수로 재임 중 흉도들과 결탁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일찍이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과 친하여 이이첨의 정치적 행위에 언관으로서 비호하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