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명여(明汝). 경기도 안성 출신.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룡(李熙龍)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경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던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1,000여 명의 만세시위군중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일본인 면장을 끌어내어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양성면과 원곡면을 경계로 하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양성면과 원곡면내의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 거주자를 축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 양성면민 수백명의 만세시위대가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원곡면에서 행진하여오던 만세시위대와 합세하여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 때 홍근배(洪根培)와 함께 건물과 기물에 불을 지름으로써 다른 군중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사기가 오른 시위군중과 더불어 계속하여 양성우편소와 일본인 소도사토[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隆秀知]의 집을 습격하고, 양성면사무소의 건물과 기물을 파손하였다.
이튿날 새벽까지 양성면 일대에서 시위를 계속하다가 원곡면으로 되돌아 와서,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로 달려가 서류와 집기류를 불태워버리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를 전개하다가 검거되었다.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경성형무소에서 7년째 복역하던 중 형무소 안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몰래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옥사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