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이우(李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李嵒)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 이강(李岡)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82년(우왕 8) 진사가 되고, 1385년 문과에 급제, 사복시승(司僕寺丞)을 거쳐 예조좌랑과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지평이 되었고, 1400년(정종 2) 좌승지 때 이방원(李芳遠)이 동복형인 이방간(李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그 해 철성군(鐵城君)에 봉작되었고, 같은 해 공안부소윤(恭安府少尹)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순군(巡軍) 윤종(尹琮)을 구타한 죄로 한 때 파직되었다. 이듬 해 복직되어 경기좌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左右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고, 1403년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으로 있으면서 고명부사(誥命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평양부윤으로 있으면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하고, 1406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와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직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판한성부윤을 거쳐, 1408년 태조가 죽자 국장을 주관하는 빈전도감판사(殯殿都監判事)가 되었고, 이듬 해 경상도관찰사로 영상주목사를 겸직하였다. 이 해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14년 영길도도순문사(永吉道都巡問使)를 거쳐, 이듬 해 6월 예조판서로 있다가 12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참찬을 거쳐 1416년 3월 판한성부사, 5월 병조판서, 1417년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와 찬성을 거쳐 이듬 해 우의정에 올랐다. 1419년(세종 1)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했고, 1421년 1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1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우의정 정탁(鄭擢)과 함께 도성수축도감도제조가 되어 8도의 정부(丁夫) 32만 5000여 명을 징발, 1422년 1월부터 두 달에 걸쳐 토성이던 도성 성곽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1425년 등극사(登極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 공신에게 주는 공훈사령장)을 박탈당하고 여산(礪山)에 안치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세조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고려 말기부터 문명이 알려져 조선 초기에 국기를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중신이다. 그러나 말년에 부귀가 모이자 지나친 위세를 부려 사람들의 지탄을 받아, 급기야 공신녹권까지 박탈당하고 고독한 귀양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용헌집』·『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이 있다. 시호는 양헌(襄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