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중(宜仲). 청기군(靑杞君) 이표(李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함천군 이억재(咸川君 李億載)이다. 아버지는 상국문충공(相國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며, 어머니는 영일정씨(迎日鄭氏)로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1599년(선조 32) 31세 때에 비로소 벼슬에 나가 4현(縣), 5군(郡), 2부(府)의 목민관으로 전후 11차의 외직을 지냈다. “청렴하면 공정히 되고 공정하면 밝게 된다(廉則公 公則明).”, “인민애물의 마음으로 정치를 하라(爲政以仁民愛物爲心).”, “호령을 고르게 하고 상벌에 사가 없으면 백성은 순종한다(號令平而賞罰無私則民服).”, “민심이 흩어지면 만사를 그르친다(民心散則萬事非).”라는 아버지의 훈계를 체득, 실시하여 지방관 시절의 성적(聲績)이 많았다.
특히 양근군수(楊根郡守)로 재임시에는 치적이 으뜸으로 평가되어 표리(表裏: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가 하사되었고 재임(再任)하였다. 1627년(인조 5) 철원부에 나가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났는데, 양서원수(兩西元帥)가 철원부 관서에 들어오자, 이들과 함께 융졸(戎卒: 군졸을 훈련시킴)·척후(斥候: 적의 정세를 살핌)·병식(兵食: 병사들의 식량을 공급함)을 도모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호가하였으며, 청병(淸兵)이 물러간 뒤 경기 지방의 민심이 흉흉하자 조정에서도 의전이 맑으면서 깨끗하고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 하여 가평의 목민관을 명하였다.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고 완선군(完善君)으로 봉하여졌다. 70세에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에 들었으며, 만년에 서호(西湖)에서 살다가 80세 노인으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