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립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형조참의, 좌승지, 예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정(子政)
계은(溪隱)
시호
문희(文僖)
이칭
광림군(廣林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6년(명종 11)
사망 연도
1595년(선조 28)
본관
광주(廣州)
주요 관직
형조참의|좌승지|예조참의
관련 사건
기축옥사|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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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형조참의, 좌승지, 예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좌랑 이수겸(李守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찰방 이이건(李以乾)이다. 아버지는 판결사 이시무(李時茂)이며, 어머니는 종실(宗室) 의원정(義原正) 이억(李億)의 딸이다. 최립(崔岦)·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6년 사마시에 합격, 1580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582년 수찬 때, 대제학 이이에게 추천되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시강해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 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조좌랑·정언을 지냈다. 이듬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하였다.

이조좌랑 때 호남어사가 되어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진구하였다. 그 뒤 형조참의·좌승지 등을 거쳐,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장령·집의·응교·직제학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참의로 왕을 호종하였다.

왕의 행차가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와 사직의 위판(位版: 신위 또는 위패)이 지금 개성에 남아 있다고 아뢰니, 선조가 크게 놀라면서 즉시 모셔 오라 하였다. 급히 개성으로 달려가, 사람들이 모두 “이미 적장이 와 있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말렸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성에 들어가 종묘사직의 위판을 평양으로 모셔갔다.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1593년 부친상을 당해 한 때 관직을 떠났다. 1594년에 한성부좌윤·황해도관찰사를 역임,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는 『계은집』이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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