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좌랑 이수겸(李守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찰방 이이건(李以乾)이다. 아버지는 판결사 이시무(李時茂)이며, 어머니는 종실(宗室) 의원정(義原正) 이억(李億)의 딸이다. 최립(崔岦)·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76년 사마시에 합격, 1580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582년 수찬 때, 대제학 이이에게 추천되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시강해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 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조좌랑·정언을 지냈다. 이듬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하였다.
이조좌랑 때 호남어사가 되어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진구하였다. 그 뒤 형조참의·좌승지 등을 거쳐,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장령·집의·응교·직제학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참의로 왕을 호종하였다.
왕의 행차가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와 사직의 위판(位版: 신위 또는 위패)이 지금 개성에 남아 있다고 아뢰니, 선조가 크게 놀라면서 즉시 모셔 오라 하였다. 급히 개성으로 달려가, 사람들이 모두 “이미 적장이 와 있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말렸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성에 들어가 종묘사직의 위판을 평양으로 모셔갔다.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1593년 부친상을 당해 한 때 관직을 떠났다. 1594년에 한성부좌윤·황해도관찰사를 역임,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는 『계은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