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교(子喬). 이인수(李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미(李梶)이고, 아버지는 군수 이언직(李彦直)이다. 어머니는 상례(相禮) 신유(愼有)의 딸이며, 부인은 홍영(洪霙)의 딸이다.
1637년(인조 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지평을 거쳐 1652년(효종 3) 필선이 되었다. 1657년에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음해에 돌아와서 사간이 되었다.
1659년(현종 즉위년)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기년설(朞年說: 만1년복)을 주장하여 이를 실시하게 하였다. 이어 헌납을 거쳐 장령·집의·사간·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65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때마침 영동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으므로, 조정에 곡식을 극력 요청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여 구제하였다. 1667년 승지가 되고, 1670년 예조참의·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에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673년 경기관찰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 예조참판이 되고 이 해 제2차예송이 일어나자 예관으로서 대공설(大功說: 9개월복)을 주장, 남인의 기년설과 맞서서 대항하다가 남인의 주장이 관철되자 서인의 몰락과 함께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