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광초(廣初), 소자는 계상(桂祥), 호는 기암(起巖). 이황(李滉)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승지(承旨) 이만도(李晩燾)인데, 경술국치 후에 단식(斷食)으로 순국하였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승하(權承夏)의 딸인 숙부인(淑夫人)이다. 처음에는 숙부에게서 가학을 닦았으며, 후에는 김흥락(金興洛)에게서 수학하였다.
1919년 그는 고종황제 장례에 참석하여 3·1만세운동을 보고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 고향에 내려와 유림들을 규합하여 파리만국회담에 참가할 일을 도모하고,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하여 서명운동을 일으켰다.
이 후 집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당시의 시대 상황과 세계의 정세를 탐문하고 유림들의 애국 충정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애국 지사를 방문하여 광복운동을 의논하였다. 결국 병이 나서 1920년에는 고양(高陽)의 산사(山寺)에 기거를 했는데 자식들이 귀가하기를 간절히 청했으나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광복을 위해 고생하는데 집에 편히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퇴계집』과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탐구하였고, 우리 나라와 중국의 역대 역사 및 왕조의 치란(治亂)과 선유 제현들의 학문 및 그 특징과 차이점 등에 대해서도 정통하였으며, 우리나라 세가(世家)들의 보계(譜系)에도 밝았다고 한다. 저술로는 『기암유고(起巖遺稿)』 28권 14책, 『대학정의(大學精義)』·『양전합선(兩全合選)』 등이 있다.
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