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성보(城輔).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종(維宗), 호는 중주(中洲)·돈암(遯庵). 이정구(李廷龜)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도신(李度臣)이다. 본명이 이성보(李城輔)인데, 1801년(순조 1) 대사헌에 올라 이름의 '성'자가 정조의 어휘(御諱)를 범하기 때문에 소를 올려 직보(直輔)로 개명하였다.
일찍이 김양행(金亮行)에게 수학해 크게 아낌을 받았으며, 1784년(정조 8) 유일(遺逸: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학덕있는 인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듬 해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에 올랐다.
1791년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서 이조와 의정부의 추천을 받아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으며, 1796년 김인후(金麟厚)의 문묘 배향을 논의할 때 조헌(趙憲)과 김집(金集)도 같이 배향할 것을 역설하다가 잠시 파직되기도 하였다. 1797년 다시 세자시강원의 우유선(右諭善)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으며, 그 뒤 공조참판과 도승지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가 사직하였다.
순조가 즉위하자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로 활약하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찬선(贊善)과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크게 활약한 김원행(金元行)과 김양행을 표창하도록 상소하였다. 1806년(순조 6) 성균관좨주가 되고, 이어 1811년 다시 서연(書筵)의 우유선으로 태자를 가르쳤다.
경사(經史)에 박통해 평소에 선비들의 중망을 받았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항상 『논어』와 『맹자』 중에서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한다. 특히 재물에 관심이 없어 평생을 청렴하게 지내다가 무주에서 죽었다. 뒤에 순조가 치제(致祭: 2품 이상의 실직을 역임한 신하가 사망한 경우에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 제사지내던 일. 또는 그 제사)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