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시언(時彦). 자는 군미(君美), 호는 추천(秋泉)·졸암(拙菴).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5대손이며, 고림정(高林正) 이훈(李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선손(李璿孫)이고, 아버지는 부호군 이형(李泂)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별좌(別坐) 정응운(鄭應雲)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를 거쳐, 1576년(선조 9)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적·호조좌랑·공조정랑·지평·사성·영변판관·삼화현령 등을 역임하고, 평산부사로 나갔다가 1589년(선조 22) 사임하였다. 그 뒤 교리·상의원정(尙衣院正)·태복시정(太僕寺正)을 지내고 강릉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장령·사재감정(司宰監正)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가 있자 곡산(谷山)으로부터 도보로 행재소(行在所)로 가 국가 회복의 방책을 조목조목 진언하였다. 이때 명망 있는 중신(重臣)들을 각 처에 보내 백성들을 위무하여 민심 수습에 전력을 다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어 사예·헌납·장령 등을 거쳐, 해서(海西)에 나가 군량을 조달하였다
1593년(선조 26) 황해도방어사를 거쳐 사간이 되었는데 서울이 수복되자 환도(還都)할 것을 간하였다. 그 해 5월 어려움을 당한 나라에 대한 나라 걱정하는 성의가 지극하다 하여 가자(加資)되었다. 12월에는 경상도·충청도 지방의 민정을 살피고 이들을 위무해야 한다는 비변사의 청에 따라 경상도 진휼어사(賑恤御史)로 파견되어 민심 수습에 진력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인천부사·전라병사를 지내고 1595년(선조 28)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특히 경주·함안 등지의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다. 그 당시 이직언은 「시무팔조(時務八條)」를 올려 왜적과의 강화를 배척하고, 정철(鄭澈)의 논죄를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이후 1596년(선조 29) 해주목사에 기용되고, 이어 인천·수원 등을 다스렸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도순찰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충청도방어사와 함께 청주(淸州)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많은 적을 참살(斬殺)하고 이를 격퇴하였다. 1598년(선조 31) 경상우도조도사가 되어 군량 모집 활동을 하였다.
1599년(선조 3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군량미 원조를 요청하고 돌아와 구마(廐馬)가 하사되고, 이어 호조참의·동부승지·부총관 등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뽑혔다.
1602년(선조 35) 부총관을 거쳐 여주목사(呂州牧使)를 역임했는데, 이 때 선정을 펼친 수령으로 명성이 높아 경주부윤으로 영전되었다.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에도 군사 훈련에 철저하고, 청신(淸愼)하게 처신하며, 행정 간소화에 노력하여 내외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1606년(선조 39) 동지중추부사로 지의금부사·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역대 실록의 중인(重印)에 힘썼다.
1609년(광해군 1)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 광해군의 형)의 옥사로 사임하였다가 1610년(광해군 2) 형조판서로 사역원제조를 겸하였다. 이어 왕세자책봉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2년(광해군 4) 개성유수가 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잠시 은퇴하였다. 이후 1616년(광해군 8) 지동녕부사로 지춘추관사를 겸하여 도청당상(都廳堂上)으로 『선조실록』 편찬을 완성하는 데 관여하였다. 1617년(광해군 9) 훈련대장이 되었는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논의에 경사(經史)를 널리 상고하고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서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좌참찬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자 양사(兩司)에서 이직언을 광해군대의 8간(奸)으로 지목, 이를 철회하고 귀양보낼 것을 간했으나 묵살되고 곧 특지(特旨)로 우찬성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우찬성·판중추부사·판돈녕부사로 임금을 강화도에 호종해 척화를 주장하였다. 성품이 매우 청백했다 한다. 임진왜란 때의 공로로 선무공신(宣武功臣) 후보에 올랐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