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성유(聖兪). 아버지는 경력(經歷) 이수구(李壽龜)이다.
추천에 의하여 1738년(영조 14) 선전관이 되고, 그 이듬해 무과에 급제한 뒤로 크게 진출하여 1747년 상원군수로 취임하였다. 1752년 안동영장(安東營將)이 되었으며, 1754년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함춘군(咸春君)에 봉하여졌다. 1776년(정조 즉위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779년 차대(次對) 때에 왕이 통영의 조폐(凋弊)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균역법 실시 전에는 어염(魚鹽)과 미역밭에 내왕하는 배를 통영에서 관리하므로 그곳 주민 3,000여호가 모두 부유하였으나, 지금은 수리(水利)를 잃고 쇠퇴하고 있으니 균역법을 폐지하여야 합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우포도대장이 되어서는 국가를 변란시키려는 음모를 사전에 적발하는 등 활약이 컸다. 1781년 어영대장이 되었고, 그뒤 총융사로 있으면서 경연의 주강(晝講)에서는, 북한산성을 수비하는 성장(城將)도 남한산성의 경우처럼 곡식을 들이는 일과 성곽수호만을 하게 하자고 건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