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희 ()

연극
인물
해방 이후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전승자로 지정된 기예능보유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3년
사망 연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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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전승자로 지정된 기예능보유자.
개설

보유종목은 각시이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이재수(李再壽).

생애 및 활동사항

큰광대 윤필봉(尹必奉)의 연출로 이루어진 1928년 별신굿 때 17세 소년으로 각시 역을 맡아 놀았다.

하회별신굿은 전승집단이 해체되어 단절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하회별신굿 보유자로 지정된 임형규가 현지 생존자들을 수소문하고 불러모아 재결성하였다.

당시 이창희 명인은 「하회별신굿탈놀이」 전반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각시광대놀이는 서낭각시에 대한 신앙심이 존속되는 제의극(祭儀劇)이지만, 1928년에 이미 신을 놀리는 탈굿으로서보다는 동물이나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탈놀이로 전승되었다고, 이창희 명인은 회고한 바 있다.

본적은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豊山面) 해곡동(海谷洞)이고, 주소는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읍 하리2동(下里2洞)이다. 본업은 농업이다.

1978년 춘천에서 개최된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이어서 1980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고, 동시에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1992년과 1993년 일본공연과 1995년 미국 워싱톤 · LA공연을 다녀온 바 있다. 이창희 명인의 맥을 이상호(李相浩)와 임형규(林衡奎)가 잇고 있으며, 현재 하회별신굿에 종사하는 예능인들의 대부분이 이창희의 제자이다.

이창희의 보유종목인 각시의 얼굴모습과 분장하는데 사용되는 의상과 제도구는 다음과 같다. 머리위로 한일자로 여섯 타래의 큰머리를 얹고, 그 머리는 다시 두귀를 덮으며, 좌우로 똑같이 머리채를 턱아래까지 드리워 좌우대칭(左右對稱) 효과를 나타낸다.

그 머리채는 한 번씩 안으로 돌려 땋아내린 끝에 둥근 동간을 둔 채 연결되어 있는데, 오른쪽은 손상되어 있다. 비교적 넓은 광대뼈를 가진 펑퍼진 얼굴에 입은 다물었고, 굳은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머리와 눈썹은 검게 칠하고, 얼굴 전체는 살색으로 채색하고, 그 위에 다시 찹쌀풀에 분(粉)을 타서 만든 흰색으로 채색한다. 둥근 연지와 곤지를 이마에 찍고, 붉은 색으로 입술을 칠한다. 눈은 실눈(半眼)으로 떳는데, 왼쪽눈이 오른쪽 눈보다 모양이 약간 커서 좌우대칭이 맞지 않는다.

코는 평평한 편이며, 두 눈은 뚫고, 입은 뚫지 않는다. 탈의 크기는 높이가 39.5cm, 너비가 20cm이다. 각시의 의상은 처녀의 옷차림으로 노랑저고리와 푸른 치마에 짚신을 신는다.

이창희 명인의 각시의 연기는 일품으로 “사뿐사뿐 각시걸음”이라는 별명이 전한다.

참고문헌

『탈놀이의 기원과 구조』(박진태, 새문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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