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이당고(李唐古)이며, 상장군 이응공(李應公)의 아들이다.
일찍이 고려를 배반하고 원나라에 도망하여 들어갔다. 1271년(원종 12)에는 금(金)·칠(漆)·청등(靑藤)·팔랑충(八郎蟲)·비목(榧木)·노태목(奴台木)·오매(烏梅)·화리(華梨)·등석(藤席) 등이 고려에서 생산된다고 무고하고 이를 구하러 고려에 파견되었다.
1272년 3월에 고려에 와서 큰 나무를 요구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도 고려에 와서 원나라의 궁실(宮室)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를 징발하였다. 이 때 고려에서는 이추를 기쁘게 하여주려고 장군을 제수하였으나 목재와 노비·재물을 배 10척에 싣고 돌아갔다.
1273년 12월에 또다시 목재를 구하기 위하여 고려에 파견되어 울릉도에 가려 하자 고려에서는 대장군 강위보(姜渭輔)를 울릉도작목사(鬱陵島斫木使)로 삼아 함께 가도록 하였는데, 강위보의 관직이 낮다고 불평하여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허공(許珙)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1273년 고려의 요청에 따라 원나라가 울릉도의 목재를 징발하는 것을 철회함으로써 원나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