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동장(東章), 호는 단암(丹庵). 이제한(李齊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李禎)이고, 아버지는 이몽엽(李夢曄)이며, 어머니는 박경원(朴慶遠)의 딸이다. 생원 이몽려(李夢呂)에게 입양되었다. 장인은 홍만기(洪萬紀)와 윤학해(尹學海)이다.
1711년(숙종 37) 통덕랑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뒤 전적으로서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였으며, 1725년(영조 1) 옥구현감으로 재직하면서 관비에 편입된 이술지(李述之)의 처에게 횡포한 짓을 저지르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귀양갔다.
그 뒤 1727년 풀려난 이후 30여년간을 고향에서 지내면서 글을 벗하고 살았는데, 1758년 다시 기용되어 사헌부장령이 되었고, 1760년 승지,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고, 67세의 많은 나이로 가자(加資)되었다.
1765년 영수각(靈壽閣)에서 기신(耆臣)의 위치로 크게 예우를 받았으며, 그가 죽은 뒤 1771년 영조는 18세라는 어린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그의 재질을 크게 칭찬한 뒤,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 가운데 18세 때 문과에 급제한 자가 누가 있느냐고 말하면서 그의 자손들을 등용하여 녹을 주도록 지시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영민(榮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