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빈(而賓), 호는 만회(晩晦).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예열(李禮悅)이고, 아버지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이사수(李士修)이며, 어머니는 종친부전첨 김선(金銑)의 딸이다.
1597년(선조 3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사서·병조좌랑·수찬·지평·문학·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605년에 함경도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상의원정(尙衣院正)·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장령이 되고, 1610년에 한성부우윤이 되었다가 곧 대사간이 되고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여『선조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612년에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1618년에 한남군(漢南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우참찬·특진관(特進官)을 지내고 1627년(인조 5)에 다시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적을 피하여 달아났다. 1641년에 경기도관찰사로 등용되고, 1644년에 예조참판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 심양에 다녀왔다. 이듬해 개성부유수가 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