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량(汝量). 태종의 아들 경녕군 이비(李礻+非)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유인(李𥙿仁)이다. 신장이 8척이나 되고 음성이 큰 종소리 같았으며, 힘이 장사였다.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한때 궁중 금원(禁苑: 출입이 금지된 대궐안의 후원) 안에 들어온 범을 잡은 일이 있었다. 이이첨(李爾瞻)이 문무백관을 위협하여 폐모하기를 청할 때에 참여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때 돈화문 밖에서 수비하다가 밤에 반정군이 이르자 문을 열어 들어가게 하였다. 반정 후 그를 죽이려 하자, 이귀(李貴)가 길을 비켜준 그의 공을 역설하여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뒤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군에 들어가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우고, 자산부사를 거쳐 부총관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회답사(回答使)가 되어 청나라 심양(瀋陽)에 갔을 때, 심양에서는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왕을 황제로,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하여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그의 일행을 조선 사신으로 참여시키려고 하였으나,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그 의식에 불참하고 돌아왔다.
우리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잘못 전하여 듣고, 한때 선천에 유배시켰다가 뒤에 충절을 알고 석방하였다. 이 해 호적(胡賊)이 침입하자 남한산성을 수비하는 데 활약하였고, 난이 끝난 뒤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41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강(忠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