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신. 아버지 인수(仁洙)와 어머니 박성일(朴聖一)의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며, 어머니의 교육열로 7세 때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1908년 평양의 숭의 여학교에 입학, 황신덕(黃信德)의 집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이때 애국애족사상을 인생의 지표로 삼게 되었다.
졸업 후, 황해도 삼화읍 교회학교를 거쳐 1913년부터 1914년까지 모교인 숭의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 때 선배교사 황신덕과 송죽 형제회를 조직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5∼1917년에 강서군 사달학교를 거쳐 1917년부터는 중화군 양무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여기에서 3·1운동을 맞았다.
만세시위의 주동자로 6개월의 징역을 받고 1920년 4월 출옥하였다. 어머니의 죽음, 오빠의 독립운동으로 인한 가정의 고초, 그리고 자신의 병으로 고생하던 중 신앙을 새로이 발견하고 서울여자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인 1921년 3·1운동 2주년 기념시위를 주동하여 정학처분을 받았고, 1924년 졸업 후에는 태화 여자관 성경학교 교감, YWCA 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전주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사감 및 교사로 재직하면서 전주 YWCA를 조직,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29년부터는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연합회 총무로 취임하여 금주·금연을 위한 강연회와 가두계몽에 진력하면서 금주가도 보급하였고, 『절제』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였다.
또한 국산품장려운동, 색깔 있는 옷 입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에 전도사로서 수표교교회·동대문교회를 시무하였고, 1956년부터 10년 동안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연합회 부녀국 총무로 활동하다가 은퇴하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사회 계몽 운동·여성교육·전도활동 등에 헌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