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관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한국특무대독립군 연락원, 임시의정원 함경도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마초군(馬超軍)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0년
사망 연도
1975년
출생지
함경북도
정의
일제강점기 때, 한국특무대독립군 연락원, 임시의정원 함경도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이명은 마초군(馬超軍). 함경북도 출생. 초창기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 주로 김구(金九) 계열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 2월 김구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입교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할 때, 그 대원이 되었다. 한국특무대독립군은 난징[南京]의 목장영(木匠營) 고안리(高安里) 1호에 본부를 둔 김구의 사조직으로, 일명 김구구락부(金九俱樂部)라고도 불렸다.

1935년 4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설치한 한인특별반(일명 뤄양군관학교)을 졸업하였다. 1935년 9월에는 한국특무대독립군 연락원으로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에 파견되어 광저우를 중심으로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편으론 중앙육군군관학교의 입교생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중산대학(中山大學)에 다니기도 하였다.

김구가 이끌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에서 광둥 지역에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김인(金仁)·안우생(安偶生) 등을 파견해 오자, 중산대학 학생인 김덕목(金德穆)·김용(金鏞) 등과 함께 1937년 2월 한국청년전위단(韓國靑年前衛團)을 조직하였다. 한국청년전위단은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의 광둥지부를 와해시키고 조직한 한국국민당의 전위조직으로서, 동당의 광둥지부 역할을 하였다.

1938년 10월 일본군이 광저우를 점령하자 이곳을 떠났다. 1939년 2월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무장세력으로 결성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 대원으로 활약하였다. 임시정부가 치장[鈴江]에 도착해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던 1939년 10월 임시의정원에서 함경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8·15광복 때까지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한상도, 문학과 지성사, 1994)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1974)
「김구의 항일 특무조직과 활동」(한상도, 『한국민족운동사연구』4, 1989)
집필자
한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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