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6,061㎡. 경서동 일대는 과거 서해에 면한 해변으로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서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제작된 5개의 가마터가 발굴되었다. 그중 1개소를 1965∼1966년에 걸쳐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바 있다.
발견된 가마의 구조는 지면을 약간 파고 벽을 올렸기 때문에 기저부가 지하에 있으며 그 위로 벽과 천장을 쌓아올렸던 것 같다. 지금은 지하의 기저부와 지상의 벽이 약간 남아 있다.
가마는 3∼4°의 자연 경사를 이용한 등요(登窯)로, 내부는 칸이 없는 통가마이고 평면은 봉통(아궁이)과 가마 사이가 약간 좁은 기다란 형태이다. 봉통과 가마의 너비는 평균 1.2m이며 봉통과 가마 사이의 너비는 1.05m이다. 가마의 길이는 7.3m로 가마의 두부(頭部)는 도로가 나서 이미 파괴되어 있었다.
가마바닥[요상(窯床)]은 세 차례의 보수 · 개수가 있었으며 처음에는 지하로 좀더 깊이 묻었으나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개수 때마다 요상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1차 요상은 지면에 모래를 깔았으며, 2차 ·3차 요상은 판판한 돌들을 깔고 그 위에 점토를 다지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았다.
세 번째의 개수 · 보수 때에는 가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요상은 점차 높아져서 지면과 거의 같아졌다. 요상은 계단식이 아니고 경사가 졌으므로 도지미[도침(陶枕)]로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즉 대소(大小) 원형 도지미의 사면(斜面)을 가마의 사면에 닿게 놓으면 도지미의 윗면이 수평이 되어 거기에 그릇을 올려놓고 구울 수 있다.
이 가마에서 만든 것은 녹청자로, 태토(胎土)에는 잡물(雜物)이 많고 표면에는 기공(氣孔)이 많으며 유색(釉色)은 녹청색 · 녹갈색으로 표면이 고르지 못하다. 문양은 소문(素文)이 대부분이며, 드물게 병(甁) 몸체의 면을 깎은 주름무늬가 보인다.
기형은 대접 · 접시 · 병 등이 많으며, 그 중 반구병(盤口甁)은 오대(五代)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녹청자는 1983년에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일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
대체적으로 녹청자는 통일신라 토기에서 고려 청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청자로 알려졌었으나, 실제로는 녹청자 중에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기형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은 것이 많고, 가마의 구조도 고려청자 가마와 비슷하다. 따라서 그 제작 시기가 해남의 예에 비추어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에 걸치는 초기 청자의 한 양식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