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禪僧). 성은 장씨(張氏). 호는 휴옹(休翁)·선화자(禪和子)·경성(敬聖) 또는 광성(廣聖). 경상남도울산 출신. 아버지는 윤한(胤韓)이며,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다. 어머니가 명주(明珠)를 삼키는 태몽을 꾸고 낳았다. 어려서부터 마늘이나 파, 고기를 싫어하였고 불교의 놀이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3년 동안 몹시 슬피 울다가 무상함을 느끼고 13세에 단석산에 있던 해산(海山)에게 의지하여 3년 동안 심부름을 하다가 1503년(연산군 9)에 승려가 되었다.
1511년(중중 6)에 묘향산 문수암(文殊庵)에서 고행(苦行), 정진하다가, 지리산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참구(參究)하라.”는 지도를 받아 활구(活句)를 깊이 참구하였다.
그 뒤 금강산시왕동(十王洞)에서 좌선하다가 오도(悟道)하였는데, 이로부터 항상 경절문(經截門 : 문자나 언어를 떠나 수행의 지위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證果를 얻는 교법)의 언구를 사용하였다. 그 뒤 표훈사(表訓寺)의 승당(僧堂)에서 한 해를 보내고 상원암(上院庵)에서 2년을 안거하였다.
1536년 중종이 승군(僧軍)에게 신천(新川)을 막게 하였는데 그곳을 지나다가 도청(都廳)의 대관(大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대관은 그의 비범함을 알고 반 달 동안 함께 있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대부와 서민들이 소문을 듣고 보시(布施)하여 명성이 퍼지자 사헌부에서 세상을 미혹한다는 이유로 금부(禁府)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그러나 늠름한 태도와 곧고 이치에 합당한 말에 감복하여 방면하였다.
그 뒤 서산(西山)에서 9년 동안 은거하다가 1544년에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관음전(觀音殿)에 머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이때 의웅(義雄) 등 문인들이 당(堂)을 세우고 경성(敬聖)이라 하였다. 때로는 여러 제자들을 불러서 활구(活句)를 참(參)할 것을 간절히 당부하였고, 한 생각으로 회광(回光)하면 보리(菩提)의 바른 길임을 가르쳤다.
1568년 2월 30일 제자들에게 “모든 인자(仁者)들은 정념(正念)을 가지고 애착을 품지 말며, 또한 속(俗)을 따라서 쓸데없이 일을 떠벌이지 말라.”고 당부하고, 자신의 시체를 새와 짐승에게 먹이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긴 다음,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나이 80세, 법랍 65세였다. 제자로는 의웅·의변(義卞)·선등(禪燈)·일정(一精)·성준(性峻)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