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형 ()

불교
인물
일제강점기 용주사 주지, 30본산주지회의 위원장 등을 역임한 승려.
이칭
금허(錦虛), 대련(大蓮)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5년(고종 12)
사망 연도
1942년
출생지
경상남도 진주
정의
일제강점기 용주사 주지, 30본산주지회의 위원장 등을 역임한 승려.
개설

경상남도 진주 출신. 성은 강씨(姜氏). 처음의 법명은 보영(寶英), 법호는 금허(錦虛)·대련(大蓮).

생애와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경서(經書)를 통달하였다. 즐겨 불경을 공부하였고, 14세에 아버지가 죽자 금강산장안사(長安寺)로 가서 우란분회(盂蘭盆會: 부모의 천도를 위해 올리는 재)를 열어 아버지의 영혼을 천도하였다. 이때 『목련경(目連經)』을 보고 느낀 바 있어서 진허(震虛)를 스승으로 삼아 출가하였다. 그 뒤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한시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01년에 순헌비(淳獻妃)로부터 만금(萬金)을 하사받아 폐허가 된 해은암(海恩庵) 자리에 해광전(海光殿)·범왕루(梵王樓)·자신각(紫宸閣)을 신축하였다. 1911년에 대본산(大本山)용주사(龍珠寺) 주지가 되었으며, 그 뒤 불교 진흥과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몇몇 사건에 연루되어 친일승(親日僧)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1919년 11월에 그는 「조선불교기관확장의견서」를 일본 정부에 냈는데, 그 의견서에는 조선의 여자와 일본의 승려를 결혼하게 하고 일본의 여자와 조선의 승려를 결혼하게 하여 두 나라 사람 사이에 정신적으로 융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그는 30본산주지회의 위원장직에 있었으므로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개인적으로는 우리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켜 교권을 잡자는 데 속셈이 있었다.

1920년 2월 이회광(李晦光)이 30본산을 일본 임제종의 묘심사파(妙心寺派)에 부속시키려고 획책하였을 때에는 교권수호운동을 벌여서 이를 강력히 저지하였다. 1923년에는 유신회(維新會)와 강력한 마찰이 있어 유신회로부터 조선 불교계의 큰 악마로 낙인찍혔으며, 일부 과격한 청년 승려들에 의해 절에서 내쫓기는 명고축출(鳴鼓逐出)을 당하기도 하였다.

1937년 31본산의 총본산(總本山)을 세우려고 했을 때에도 총본산이 31본산의 연락기관 정도로 충분하며 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여 만공(滿空)으로부터 크게 꾸짖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나이 67세, 법랍 54세로 입적하였다.

참고문헌

『불교근세백년(佛敎近世百年)』(강석주·박경훈, 중앙일보사, 1980)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 신문관,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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