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회진(會津). 본명은 수룡(水龍). 서울 출생. 주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치과병원에서 일하면서 경성양화연구소에서 미술수업을 받았다.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유화 「봄 스케치」로 처음 입선하였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서화협회전람회에 연속 출품하였고, 1936년부터 41년까지 선전에 여인상과 풍경을 그린 작품이 거듭 입선하며 양화가의 위치를 굳혔다. 1936년에는 송정훈(宋政勳), 엄도만(嚴道晩) 등과 ‘녹과전(綠果展)’을 만들어 1938년까지 3회의 동인 작품전을 가졌고 1938년 서울 오아시스다방에서 소품 21점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1939년에는 중국으로 가서 1945년 광복으로 귀국할 때까지 북경과 만주 일원에서 「고궁의 추광」, 「중국인상」 등과 같은 역사 유적과 중국 풍정을 그렸다. 중국 시기의 풍경화들은 대작은 물론 소품에서도 구도가 웅장하고 광대하게 그려졌고, 색채 구사도 매우 생동적으로 풍부한 역량을 나타냈다. 임군홍은 만주에 정착하여 한구(漢口)미술광고사를 운영하는 한편 김혜일(金惠一)과 2인전을 개최하였고 1941년에는 일본의 무한(武漢)미술전에 「고낭(枯娘)」을 출품하였다.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고려광고사를 운영하며 미국 공보원이 주문한 그림 등을 그렸다. 그러면서 순수 작품활동도 병행하여 1946년에는 엄도만, 한홍택(韓弘澤), 신홍휴(申鴻休), 이종무(李種武) 등과 ‘양화6인전’을 가졌다. 1947년에는 이쾌대(李快大) 등이 주도한 조선미술문화협회 창립에 동참, 1949년까지 그 회원 작품전에 참가하며 「설경(雪景)」 등을 출품하였다.
임군홍은 6·25전쟁 중 월북하였고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을 지냈다. 1962년 이후에는 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로 활동하였다. 1970년대에는 유화를 포기하고 조선화 기법을 터득하여 「동기골 전투」(1973), 「공장을 지키는 사람들」(1974) 등을 조선화로 제작하였다. 이밖에도 소설삽화와 신문삽화를 제작하였다.
해금되기 전인 1984년 유족에 의해 롯데미술관에서 『임군홍전』이 열렸다. 그 뒤 1988년 월북작가 해금조치 이후 1990년신세계미술관에서 열린 『해금작가유화전』에 6점이 출품되었으며, 1996년 미공개 유화 소품 40여 점을 중심으로 갤러리 도올에서 『임군홍(林群鴻), 삶과 예술을 찾아서』가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