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득여(得汝), 호는 영서거사(潁西居士). 아버지는 대사간 임종주(任宗周)이다.
1777년 (정조 1) 아버지가 세도가인 홍국영(洪國榮)에게 몰려 단천에 유배되어 죽은 뒤로는 벼슬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력을 쏟았다.
그 뒤 여러 차례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세상의 부귀영화에는 뜻을 두지 않고 진리탐구에만 열을 올리니 자연히 가정 형편은 빈곤해졌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매일 유학 경전을 비롯한 여러 서책들을 두루 읽으며 사색에 잠기는 한편 묵묵히 이를 실천하면서 수양에 힘썼다.
아울러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싫어하고 오직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살려고 노력했다 한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나라의 부름으로 1809년(순조 9) 제용감부봉사(濟用監副奉事)가 되었다가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을 거쳐, 한성부와 사복시의 주부가 되었다.
그 뒤 의금부도사와 경모궁령(景慕宮令)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신령현감·충원현감을 역임하였다. 현감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간악한 아전들을 다스리는 한편 횡포가 심한 토반(土班)들을 억압해 지방행정질서와 풍속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피해를 입은 세력들이 일치단결해 반감을 품고 충청좌도 암행어사 서좌보(徐左輔)에게 고자질해, 지방을 잘못 다스린다는 억울한 죄명을 쓰고 1822년 충청도 진천으로 귀양가고 말았다.
다행히 누명이 벗겨져 이듬해 석방되었지만 그 뒤로는 일체의 세상사를 등지고 두문불출하면서 오로지 독서로써 여생을 보냈다 한다. 약간의 저서를 남겨놓았다. 학문적 계보를 보면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임성주(任聖周)를 스승으로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