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각은 회경전(會慶殿 : 당시의 正殿)의 서쪽 회동문(會同門) 안에 있었으며, 수만권의 서적이 수장되어 있었다. 이 각은 전적을 열람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으며, 하나의 서고에 불과하였다.
도서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광선과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하였고, 유사시에는 속히 대피할 수 있도록 통로도 마련하였다. 여기에 수장되었던 장서는 1126년(인종 4) 2월에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의 난으로 궁궐이 불탈 때 함께 타버렸다.
인종은 궁궐이 불타버린 뒤 수창궁(壽昌宮) 옆에 있는 시중 소태보(邵台輔)의 집을 서적소(書籍所)로 삼고, 문서를 수집하게 하는 한편, 대사성 김부철(金富轍)과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 임완(林完)을 비롯하여 여러 유신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이 장서들은 22년 뒤에 보문각(寶文閣)에 부설된 문첩소(文牒所)로 이관된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