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장도는 남녀 구별 없이 허리띠나 주머니끈에 늘 차고 다니면서 호신과 장신구 겸용으로 사용하던 것이 오랜 전통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공장(京工匠)으로서 상의원에 소속된 6명의 장인이 왕실 소용의 장도를 전담 제작하였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민수용(民需用) 장도는 광양 · 곡성 · 울산 · 영주 · 울진 등 전국에 분포된 사장(私匠)들에 의하여 충당되었다. 본래 도자장(刀子匠)으로 불렸으나 근래에는 환도(環刀) 등 일반 도검류(刀劍類)와 구분하여 장도장으로 일컫는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소형의 도검이 빈번하게 출토된 바 있다.
특히 신라의 금은요대 수식(金銀腰帶垂飾)에 붙은 장도 형태의 장식은 그 시원을 가늠하게 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조선시대에는 손칼로서의 실질적 기능보다는 상징성과 장식성이 강조되어 여인들의 노리개장식의 일부가 되는가 하면, 심지어 칼날을 뺄 수 없게 고정된 장도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장식기능이 강조될수록 정교하고 화려한 치장의 장도가 다채롭게 제작되게 마련이다. 특히, 장도집과 자루 등 외부에 노출된 부분에 뿔과 쇠뼈 · 화류 · 먹감나무를 비롯하여 금 · 은 · 밀화(密花) · 대모(玳瑁) · 상아 · 수정과 같은 고급재료를 써서 각종 문양을 조각하거나 상감하였다.
종류는 외형에 따라 첨사도 · 네모도 · 을자도(乙字刀) · 을자맞배기 · 평맞배기 등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을자도 계통이 가장 일반적이다. 근대기를 거치면서 장도 분야는 수요 기반이 무너져 크게 쇠퇴하였으나 몇몇 장인들에 의하여 그 제작기술이 오늘에까지 전하고 있다. 현재 기능보유자로는 박용기(朴龍基)가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