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응칠(應七), 호는 운고(雲皐). 아버지는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은 장보(張보)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이관운(李觀運)의 딸이다.
1849년(헌종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제수받았고, 1857년(철종 8) 지평이 되었다. 1862년 민란이 일어나자 선비들과 교당(校堂)에 모여 민란의 원인을 분석하여 미연에 방지할 계책을 논의하였는데, 이 일로 오히려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무고를 당하였으나 사실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864년(고종 1) 장령·장악원정이 되어 경연에서 강의하였으며, 1865년 이후 현풍현감·집의·교리·동부승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80년 북청부사 재임시에는 지방의 교육기관을 활성화시켜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교량을 수리하며 관개시설을 설치하는 등 지역발전에 힘썼다.
또한, 글도 잘 지었는데 장시표가 남긴 글 가운데 전문(箋文)이나 기우제문 등은 그 문장이 간략하면서도 웅장하며 엄격한 절제미가 돋보인다. 저서로는 『운고문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