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송은(松隱). 장균(張均)의 아들이다.
고려 말 정헌대부(正憲大夫) 덕녕부윤(德寧府尹)의 관직에 있을 때 함주(咸州: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갈한천(乫罕川)이 해마다 범람하여 재해가 많았으나 해당 수령들이 그 대책을 세워 해결하지 못하자 특별히 함주부사로 임명되었다.
10여 년 동안 함주에 재임하여 있으면서 치수공사를 완수하였으며, 또 목판으로 길이 70간이나 되는 만세교(萬世橋)라는 다리를 놓았다.
그 뒤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태조가 친필의 편지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아들 장중양(張仲陽)과 함께 경상북도 구미의 인동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기우자집(騎牛子集)』의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16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정(李象靖)이 지은 유허비문(遺墟碑文)을 보면, 장안세의 거관치적(居官治績)과 애국충절이 잘 기술되어 있다. 인동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송은실기』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