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문재(文哉). 장봉정(張鳳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민(張旻)이고, 아버지는 상주목사 장우한(張遇漢)이며, 어머니는 군수 유호(柳浩)의 딸이다.
박장원(朴長遠)·조복양(趙復陽) 등과 교류하였다.
일찍이 사예로서 시장(試場)에서 이름을 떨쳤는데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25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1644년(인조 2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세자시강원의 설서가 되었고, 다시 예조좌랑·정언에 올랐다.
이 후 2년간 관직을 떠났다가 황해도사·해운판관을 역임하였다. 이 때 홍문관에서 여러 차례 천거한 바 있었으나 쓰이지 못하였다가 효종이 즉위한 뒤 비로소 조정에 들어가 홍문관의 부수찬을 거쳐 수찬이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경연(經筵)의 검토관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 중 어사로서 영남지방에 나가기도 하였다. 1651년(효종 2)에 당직근무 중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곧 죽었다. 이 때 효종은 교(敎)를 내려 슬픔을 표시하고 부조금을 하사하였다. 그는 매사에 언의(言議)가 곧고 남을 좇아 부화뇌동하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