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농민운동의 주축이었던 농민조합운동 세력들은 1930년대 중반 이후에 일제의 탄압때문에 활동을 중지하고 잠적하였다. 그 후 이들은 1945년 광복 직후 각 지방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농민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1945년 12월 8일 전국적인 농민조합 연합체로서 남북한지역의 대표 576명이 참석하여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을 결성하였다.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은 약칭 ‘전농’이라고 하며, 1990년 결성된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과는 다른 단체이다.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은 13개 도에 도연맹, 군단위에 188개 지부, 면단위에 1,745개 지부를 두고 조합원 약 330만명으로 구성되었다. 1946년 1월 31일 북한에 전농 북조선연맹을 결성하였고, 같은 해 5월부터는 ‘북조선농민동맹’으로 개칭하고 전농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였다.
전농 결성대회에서는 위원장, 부위원장 이하 6개 부장을 선출하였다. 결성대회에서 채택된 28개 당면 요구 조건 중 중요한 것은 토지개혁과 3:7제 소작료운동, 양곡수집령 반대 등이었다.
그리고 결성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직원칙을 결정하였다. ① 빈농을 중심으로 농민의 계급적 대중단체로 구성할 것, ② 농민조합의 강령을 승인하는 자로서 조직된다는 원칙을 기계적으로 인식하지 말고 봉건지주와 싸우며, 또는 싸울 수 있는 농민이면 모두 가입시켜 어디까지나 광범한 대중조직이 되어야 할 것, ③ 동리(洞里)분회를 기초조직으로 할 것, ④ 지역별적 조직이 될 것, ⑤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일 것, ⑥ 튼튼한 규율을 가질 것, ⑦ 다른 진보적 계급층과 진보적 단체와 협동하는 조직일 것 등이었다.
전농은 3:7제 소작료운동과 미군정의 양곡수집령 반대, 그리고 토지개혁 등이 주된 활동 내용이었다. 3:7제 소작료운동은 미군정이 3:1제 소작령을 공포함으로써 사실상 3:7제 소작제 주장과 일치하게 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과제로 다루었던 것은 토지개혁 문제였으나 처음부터 토지개혁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다. 가장 많이 전개하였던 운동은 양곡수집령 반대투쟁이었으며, 일제하 공출제도와 같다고 하여 전면적인 싸움으로 전개하였다. 1946년 10월 추수폭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난 것이다.
전농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대중조직이었으며, 인민공화국을 지지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탄압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1947년 8월 31일 우익 농민운동이 조직되고 이승만이 초대 총재였던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의 전농 파괴 활동으로 조직이 쇠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