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시기 조선 수군의 군선은 전투함 판옥선(板屋船)과 아주 작은 사후선(伺候船), 그리고 몇 척의 거북선[龜船] 등이 있었는데, 그 뒤 수군을 재건하면서 점차 군선의 종류가 늘어났다. 1746년(영조 22) 쓰여진 『속대전(續大典)』에는 다음 〈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13종의 군선이 기록되어 있다.
도별\구분 | 전선(戰船) | 선(船) | 방선(防船) | 병선(兵船) | 사후선(伺候船) | 기타 | 합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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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 4 | 1 | 10 | 10 | 16 | 12 | 53 |
충청 | 9 | 1 | 21 | 20 | 41 | - | 92 |
경상 | 55 | 9 | 2 | 66 | 143 | 2 | 277 |
전라 | 47 | 3 | 11 | 51 | 101 | 1 | 214 |
황해 | 2 | - | 26 | 9 | 5 | 69 | 111 |
평안 | - | - | 6 | 5 | 12 | 6 | 29 |
합계 | 117 | 14 | 76 | 161 | 318 | 90 | 776 |
〈표〉 조선 후기의 군선 (단위: 척) | |||||||
*기타: 탐선(探船)·해결선(海結船)·추포선(追捕船)·협선(挾船)·갈단선(竭短船)·급수선(汲水船)·소맹선(小猛船)·별소선(別小船). *출처: 『속대전(續大典)』 |
기타: 탐선(探船) · 해결선(海結船) · 추포선(追捕船) · 협선(挾船) · 갈단선(竭短船) · 급수선(汲水船) · 소맹선(小猛船) · 별소선(別小船).
출처: 『속대전(續大典)』
그 중 전선은 가장 큰 대형 전투함이고, 병선(兵船)은 중형 무장함이며, 사후선은 대중형함에 한 척씩 부속되는 소형 부속정이다. 또한 거북선은 전선과 동일한 크기의 특수함이며, 방선(防船)은 전선보다 크기는 작지만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중형 전투함이다.
이들 군선의 편제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묶은 4척을 기본 단위로 했으며, 이들을 각 수영(水營) 산하의 각 진포(鎭浦)에 배치했지만, 여기에 방선 1척을 첨가하거나 전선 대신 거북선 또는 방선을 대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군선의 편제는 전방병선체제(戰防兵船體制)라 할 수 있고, 전선은 그 중심이 되는 주력 군선이었다. 조선 후기의 전선은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이 이름만 바뀐 것이고, 그 선체는 하체 부분과 상장(上粧) 부분으로 대별된다.
하체의 구조는 여느 배와 동일하게 평탄한 저판(底板) 위에 삼판(杉板)이라 이르는 외판(外板)과 비우(非雨, 鼻牙) 또는 비하(飛荷)라는 선수재(船首材), 선미재(船尾材)를 사면에 세워 서로 단단히 고정시키고, 거기에 필요한 만큼 보에 해당하는 가목(駕木)과 가룡목(加龍木)을 가로 방향으로 고정했다.
하체 위에 꾸민 상장의 구조는 가목 끝단에 연해 앞뒤로 길게 현란(舷欄)을 걸치고, 거기에 방패(防牌)판과 패란(牌欄)을 설치한 다음 그 상단에 상장갑판(上粧甲板)을 깔고 중앙에 지휘소인 누각(樓閣)을, 주변에 난간[女墻]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전선은 그와 같은 판옥구조로 갑판을 2층으로 하고, 노역(櫓役)을 하는 격군(格軍)을 아래위 두 갑판 사이의 안전한 장소에 두어 노를 젓게 했으며, 싸우는 군사들은 넓은 상갑판 위에 여유 있게 자리를 잡아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했다.
전선에는 삼도수군통제사가 탑승하는 통영상선(統營上船), 각 도의 수사 · 방어사급 지휘관이 탑승하는 부선(副船), 각 진포의 진장(鎭將)인 첨사만호(僉使萬戶)와 수령이 나누어 탑승하는 초관선(哨官船) 등 세 계층이 있는데, 그들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차 모두 커지고 무장도 강화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 저판의 길이를 기준으로 가장 큰 전선은 70척, 다음 크기의 것은 55척, 가장 작은 것은 47.5∼50척으로 정한 바 있으나, 숙종 연간에는 이들이 각각 72.5척, 60∼65척, 57.5∼65척으로 늘어났다. 승원(乘員)에는 임진왜란 때의 판옥선 정원이 고작 125명 정도였는데, 숙종 때 각급 전선의 정원은 각각 194명, 178명, 164명으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전선은 그 선체가 너무 둔중해 운용하기 어렵고 아무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차라리 조운선(漕運船)으로 겸용을 해보자는 전조선통용론(戰漕船通用論)도 일어났지만, 1895년(고종 32) 삼도통제영과 각 도의 병수영(兵水營)이 없어질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