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천안(天安).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된 전인량(全仁亮)의 아들이다.
충선왕의 개혁정치를 보필하였던 친충선왕파 인물이었으며 주로 문한관을 담당하였다.
1297년(충렬왕 23) 12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298년(충렬왕 24)에 충선왕이 즉위한 이후 관제를 개혁하면서 인사권을 자신이 장악하기 위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한림원(翰林院)에서 인사권을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승지로서 참여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관직 개편으로 숭문관학사 병조상서(崇文館學士兵曹尙書)가 되었다가, 6월에는 승지방(承旨房)이 복설되자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어서 7월에도 관제를 변경하면서 좌부승지 판비서시사 보문각직학사(左副承旨判秘書寺事寶文閣直學士)로 고쳐 제수되었다. 하지만 8월에 충선왕이 즉위한지 7달만에 왕위에서 쫓겨남으로써 충선왕의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충렬왕이 비록 복위했지만 전승은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았고, 1300년(충렬왕 26) 9월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자세(李資歲) 등 33명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1302년(충렬왕 28)에 밀직사(密直使)로 죽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