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보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첨의찬성사, 삼사사, 순군만호 등을 역임한 관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48년(충목왕 4)
본관
미상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낭장|대호군|자섬사사|밀직부사|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첨의평리|첨의찬성사|삼사사|순군 만호
관련 사건
입성책동
정의
고려후기 첨의찬성사, 삼사사, 순군만호 등을 역임한 관리.
개설

원나라의 환관으로 권력을 잡았던 이숙(李淑)의 처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전영보는 원래 제석원(帝釋院)의 노비였고, 금박(金箔) 제작이 직업이었다. 아마도 전영보가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숙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 이숙이 일찍이 왕유소(王惟紹)에게 붙어 충선왕의 폐위를 꾀하다 죽자, 이에 연루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먼 섬에 유배되었다.

충렬왕 때 낭장(郎將, 정6품)에 제수되었으나 대간(臺諫)이 임명장[告身]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는데, 이는 전영보가 노비 출신이라는 신분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310년(충선왕 복위 2)에는 대호군(大護軍, 종3품)에 제수되었다. 1312년(충선왕 4) 백원항(白元恒)이 형부(刑部)와 선군(選軍)의 일을 잘 처리하여 명성이 있었으므로 관아의 대출문서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때 전영보는 자섬사사(資贍司使)로서 많은 은폐(銀幣)를 횡령한 혐의로 심하게 문책을 당하였다. 이를 원한으로 품고 있다가 마침 백원항이 사복령사(司僕令史)를 곤장 쳐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왕에게 보고하여 영흥도(靈興島)에 귀양 보낸 일이 있었다.

1320년(충숙왕 7)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知密直司事兼大司憲)이 되었으나 대관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1324년(충숙왕 11)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제수되었고, 1326년(충숙왕 13)에는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성(省)으로 하려는 ‘입성책동(立省策動)’에 적극 반대하여 1등 공신이 되었다. 충숙왕 14년에는 원나라에서 충숙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으며, 충숙왕 15년에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승진한 뒤, 1339년(충혜왕 즉위)에는 삼사사(三司使)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영보의 위상은 1342년(충혜왕 2)에 순군 만호(巡軍萬戶)의 벼슬까지 올라 왕을 집으로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양민 160명을 권력으로 억압하여 천민으로 만들었던 일이 발각되어,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결정으로 본적으로 돌려보내졌다. 전영보의 열전(列傳)이 『고려사』권124 폐행전(嬖幸傳)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사』열전의 폐행전 연구」(최재진,『동서사학』2, 1996)
「고려 충선왕대 정치운영과 정치세력 동향」(박재우,『한국사론』29, 1993)
「고려 충숙왕대 정치세력의 성격」(정희선,『사학연구』42,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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