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의하면, 정득후(鄭得厚)는 최영(崔瑩)의 족당(族黨)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1389년 11월, 폐위되어 황려(黃驪: 지금의 경기도 여주)에 있던 우왕을 김저(金佇)와 함께 직접 만나 왕으로부터 예의판사 곽충보(郭忠輔)와 의논하여 이성계를 죽이라는 밀명을 받았다. 그러나 팔관회(八關會) 날에 거사를 단행하려고 했지만 곽충보의 고발로 실패했다. 이에 다시 김저와 더불어 밤에 이성계의 집으로 갔으나 이성계의 문객들에게 붙잡히자,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제 목을 찔러서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우왕은 강릉으로 유배지를 옮겼고, 창왕은 강화도로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