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득후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우왕복위사건과 관련된 관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89년(창왕 1)
본관
미상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부령
관련 사건
우왕 복위 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고려후기 우왕복위사건과 관련된 관리.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사』에 의하면, 정득후(鄭得厚)는 최영(崔瑩)의 족당(族黨)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1389년 11월, 폐위되어 황려(黃驪: 지금의 경기도 여주)에 있던 우왕을 김저(金佇)와 함께 직접 만나 왕으로부터 예의판사 곽충보(郭忠輔)와 의논하여 이성계를 죽이라는 밀명을 받았다. 그러나 팔관회(八關會) 날에 거사를 단행하려고 했지만 곽충보의 고발로 실패했다. 이에 다시 김저와 더불어 밤에 이성계의 집으로 갔으나 이성계의 문객들에게 붙잡히자,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제 목을 찔러서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우왕은 강릉으로 유배지를 옮겼고, 창왕은 강화도로 추방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 우왕의 외척과 측근」(이형우,『민족문화연구』37, 2002)
「고려 우왕대의 정치권력의 성격과 그 추이」(박천식, 『전북사학』4, 1980)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