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철산출신. 1915년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선천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양전백(梁甸伯)·김석창(金錫昌)·홍성익(洪成益) 등과 함께 신성학교 월례 기독회에서 혈서강연을 하고 ‘대호 조선청년(大呼 朝鮮靑年)’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 후 만주로 망명하여 난징(南京)에 있는 금릉신학교(金陵神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귀국하여 1924년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선천남교회를 시무하면서 1932년 평북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35년 만주 봉천 서탑 교회의 청빙을 받아 광복이 되기까지 시무하였으며, 193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만주연합회의 관리자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41년 장로교·감리교·동아기독교·성결교 등 각 교파를 통합하여 만주기독교총회가 결성될 때 총회장이 되었으며, 봉천에 초교파적 신학교인 만주 신학원을 설립하여 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용천군남시교회(南市敎會)에 부임하였으며, 그 뒤 월남하지 못하여 공산군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