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문진(文振), 천도교의 도호(道號)는 양암(樑菴), 두채(斗采) · 양채(亮采).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아버지는 정순경(鄭淳敬),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전북 익산군(益山郡) 북일면 신리(北一面 新里)에서 태어났다.
1893년까지 유학을 공부하다가 부친과 외당숙 김국현(金國炫) 등의 영향을 받아 1894년 3월 동학에 입교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대접주(大接主) 김방서(金方瑞)의 휘하에서 도집겸접사(都執兼接司)로 활동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이 실패한 뒤 잠시 피신 생활을 하다 1896년에는 대접주 장경화(張敬化)의 휘하에 들어가 동학 교단의 재건 활동에 참가하였다.
1897년에는 별중정(別中正)이 되었고, 1900년에는 전주 출신 대접주 이병춘(李炳春)의 휘하에서 활동하면서 동학 재건 활동을 벌이고 있던 손병희(孫秉熙)와 연결되었다. 1901년에는 재입교 절차를 거쳐 손병희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1903년에는 대정(大正)이 되고, 1904년에는 대접주(大接主)가 되었다. 1900년 10월에는 상경해 판서 이지용(李址鎔) 등과 교류해 궁내부 전화과(電話課) 주사가 되기도 했으나, 곧 사직하였다.
1904년 태인(泰仁) · 전주(全州) · 익산(益山) 등지의 동학 교도를 집결시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해 정부개혁을 주장하는 민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실패하였다.
특히 1905년 3월에는 전라북도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진보회 운동을 주도했던 외당숙 김국현(金國炫) 등 8인의 동학 교도를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진보회를 중심으로 한 혁신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한편, 1909년 1월부터는 천도교 중앙총부 임시의사원(臨時議事員)에 임명되었으며, 1914년 중앙총부 공동전수심법(共同傳授心法)에 참가하였다. 1919년 3·1운동으로 인해 일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1922년 4월에는 종법원 포덕사(宗法院 布德師), 이듬해에는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1933년 4월에는 감사관정(監査觀正)이 되었다. 1938년 가을 호남 지방 시찰 후 10월 3일에 사망하였다.
『학명덕존(學明德尊)』(9권)이란 문집을 남겼으며,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에도 다수의 글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