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상(子尙), 호는 철재(澈齋).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후손이며, 정재해(鄭載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시선(鄭是先)이고, 아버지는 정석범(鄭錫範)이며, 어머니는 이정룡(李挺龍)의 딸이다.
1771년(영조 47)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2년 뒤 세마(洗馬)에 보직, 정조가 세손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있을 때부터 알게 되었다. 177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정언을 거쳐, 의주부윤·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781년(정조 5) 규장각직제학에 등용되어 『국조보감(國朝寶鑑)』 찬집당상(纂輯堂上)을 겸하였으며, 경연(經筵)에서의 강화내용을 기록하여 규장각에 보관할 것을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이를 성사시켰다. 이어 대사성·부빈객(副賓客)·강화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784년에는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다. 경술(經術)과 사장(詞章)에 능하고 성품이 온아·청통(淸通)하여 강좌명사(江左名士)의 풍이 있었다. 심염조(沈念祖)와 함께 내각에 뽑혀 정조를 계옥(啓沃)하여 많은 지우(知遇)를 입었다.
문형(文衡)에 추천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으니 사류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글씨를 잘 써서 건원릉재실(健元陵齋室)의 벽시게판(壁詩揭板) 22매(枚)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