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철종 때 일어난 함평민란의 주동자이다. 1862년 2월 경상도 단성·진주에서 시작된 민란이 4월에는 전라도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함평현감 권명규(權命奎)는 3만금의 저채(邸債: 京邸吏에게 진 빚)를 갚기 위하여 현민들의 세미(稅米)와 환곡(還穀)에서 부당하게 9,000석을 더 거둬들였다. 이에 그는 4월 21일 격분한 현민들을 규합, 죽창으로 무장시킨 뒤 기치를 앞세우고 동헌으로 난입하여 현감을 끌어내어 구타하는 등 소요를 벌였다.
전라가도사(全羅假都事) 민세호(閔世鎬)의 보고를 접한 조정에서는 익산에 머무르고 있는 안핵사(按覈使) 이정현(李正鉉)을 급히 현지로 향하게 하는 한편, 현감 권명규를 파직시켰다. 안핵사가 현지에 이르자 그는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려다 체포됨으로써 난은 수습되었다.
그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이방헌(李邦憲)·김기용(金己容)·김백환(金百煥)·진경심(陳敬心)·홍일모(洪日模) 등 6명과 함께 효수되고, 채행렬(蔡行列)·장문열(蔣文烈)·도화집(陶化執) 등 11명은 2차에 걸쳐 엄형(嚴刑)을 받은 뒤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한편, 권명규는 난의 책임을 물어 영해부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