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벽 ()

북계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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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인물
조선 중기에, 경릉참봉, 청암찰방 등을 역임하였으며, 『북계집』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여완(汝完)
북계(北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6년(명종 21)
사망 연도
1642년(인조 20)
본관
풍양(豊壤)
출생지
미상
정의
조선 중기에, 경릉참봉, 청암찰방 등을 역임하였으며, 『북계집』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여완(汝完), 호는 북계(北溪). 아버지는 조수복(趙壽福)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서흥군(瑞興君) 이춘억(李春億)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었고, 1626년(인조 4) 덕행으로 천거되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637년에 청암찰방(靑巖察訪)으로 제수받았으나 1년도 못되어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왔으며, 1640년에 종묘직장(宗廟直長)으로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함창(咸昌) 황령사(黃嶺寺)에서 친구 정경세(鄭經世) 등과 함께 창의하여 군기를 관리감독하였으며, 또 적과도 무려 70여 번이나 싸워 큰 공훈을 세웠다. 이 사실은 이봉(李逢)장군이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준(李埈)과 자신의 동생 및 자식 등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창의병을 소집하였으나 벌써 이괄의 난이 평정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해산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조광벽은 평생을 임진란, 병자호란 등 국내외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나라를 위해 솔선하여 창의를 일으켜 몸소 적들과 대적하여 싸웠다. 이러한 공헌으로 200여 년 후에 연악서원(淵嶽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북계집(北溪集)』 2권이 있다.

참고문헌

『북계집(北溪集)』
『우복집(愚伏集)』
『창석집(蒼石集)』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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