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우서(禹瑞), 호는 장륙당(藏六堂). 증찬성 조남(趙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조존성(趙存性)이고, 아버지는 판서 조계원(趙啓遠)이다.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신흠(申欽)의 딸이다.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이다.
1635년(인조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164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가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예문관의 대교·봉교를 역임하고, 다시 설서로 전직하여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때 연중설화(筵中說話)를 누설한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52년(효종 3) 지평이 된 뒤, 정언(正言)·교리(校理)·헌납(獻納)·겸사서·이조좌랑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년) 사간에 임명되고, 찬집청(撰集廳) 낭청(郎廳)으로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이조의 좌랑·정랑을 거쳐 이듬해에는 집의에 올라 수덕행정(修德行政) 11조를 올렸는데, 그 중 종척(宗戚)의 궁중 출입을 막아야 한다는 조항으로 종척의 미움을 받았다.
다시 사인으로 옮겼다가 그 해 5월에는 승지가 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집의(執義)·사인(舍人)·사간·승지 등을 거쳤으며, 1661년 양주목사로 있을 때 실록 편찬의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서되었다. 이듬해 전라감사로 옮기고, 1663년 다시 승지가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라감사로 있을 때 여러 궁가(宮家)나 여러 아문의 연해읍(沿海邑) 절수처(折收處) 조사의 부실과 재난을 입은 것에 대한 허위 보고를 하여 국가 세입(稅入)의 감축을 가져왔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은거하였다.
이듬해 동대문 밖의 금산송재(禁山松材)를 불법으로 도벌한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도(徒) 2년에 처해졌다가 사망하여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 저서로 『장륙당유집』 2권이 있다.